2012년 9월 30일 일요일

월드 호라이즌 -1화 타카마가하라 - 안개의 벽


극동도의 중심에 위치한 산은 이즈모산이라고 한다. 이 산의 정상에 위치한 마을이 신역 중 하나인 타카마가하라다.
이즈모의 정상 부근에 항상 구름이 허리띠처럼 쳐져 있는 지역이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안개의 벽>이라고 부른다. 타카마가하라 유일의 관문인 이곳은 언재나 안개에 덮혀있어 방향구별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고위의 야생 몬스터가 살고 있기 때문에 타카마가하라를 폐쇄된 마을로 만들었다.
베다는 홀로 안개의 벽을 달리고 있었다. 방향을 알려주는 것은 거점에서 가져온 나침반뿐이었다. 오직 그것에 의지해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쉬지 않고 달린 지 한 시간가량이 흘렀을 것이다. 베다의 체력으로는 더 이상 달리는 것은 무리였다. 이제 체력의 한계가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 이미 한계를 넘겼을 지도 몰랐다.
W.H.에는 페인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다. W.H.초기 유저들의 폭력성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정부에서 이것을 유해매체로 지정하자 개발자들이 대학에서 연구하던 감각구현 프로그램을 도입해 버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로써 시각, 청각만이 존재하던 가상세계에 다섯 가지 감각 모두를 구현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페인 시스템은 일반적으로 일정 이하의 고통(온 몸에 캡사이신 농축액을 바른 정도라고 한다)에 한하여 거의 현실에 가까운 고통을 느끼도록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고통의 수치는 그보다 낮으며 특유의 연출로 유저들이 그 정도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 시스템의 도입에 정부 관계자들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육체적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교육효과를 가져온다고 판결을 내리고 유해매체 등록을 철회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페인 시스템은 스테미너 및 기타 수치를 대신하고 있다. 지금 베다가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것은 페인 시스템에 의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온 몸이 한 치수 작은 바디슈츠를 입은 것 마냥 온 몸이 죄이는 고통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태양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어림잡아 계산해보면 오후 2시쯤 되었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3시 정도라면 안개의 벽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
어디선가 낮게 깔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위협이 아닌 조용히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였다.
극동도에서 이런 소리를 내는 동물은 하나 밖에 없다.
극동도의 폭군 <이스트 아일랜드 카니스>. 하이에나보다 덩치가 큰 대형 늑대다. W.H.에서 혼자 있을 때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되는 동물 1순위로 꼽히는 카니스의 아종이다.
일반전술교본에 따르면 카니스 사냥은 전사 3명과 궁수 2명으로 구성된 파티가 1마리를 상대하는 것이 기본 전술이다. 하지만 일반전술교본에서도 상급 공격계 마법사가 없거나 대규모 군단을 구성하지 않을 경우 카니스 무리를 만날시에는 반드시 도망칠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울음소리로 판단해 보건데 상대는 100미터 내외의 거리에 있는 것 같았다. 베다는 울음소리가 난 반대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또다시 울리는 울음소리. 녀석이 동료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베다는 방향을 바꾸어 산 아래로 뛰었다. 카니스 무리를 만나면 최대한 빨리 그들의 영역에서 도망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월드 호라이즌 -1화 타카마가하라 - 뇌조골도(雷爪骨刀)


무언가 신비한 느낌이 드는 마을이었다. 발밑에 깔리는 구름으로 거리는 옅은 안개에 둘러싸여진 상황이다. 50보 너머로는 아른아른 보일 뿐 형체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감지할 정도였다. 마치 백일몽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을 주는 거리였다.
타카마가하라. 5대 신역(神域)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잇폰다타라는 타카마가하라에 있는 유일한 대장간이다. 이곳의 대장장이는 소묘 연습용 두상 같이 각진 얼굴에 몸 이곳저곳에 불똥이 튀어 생긴 화상자국이 얼룩처럼 보이는 사내였다. 항상 뜨거운 불길을 바라보아서 한쪽 눈이 멀었지만 타카마가하라에서 최고의 대장장이로 통하고 있었다.
잇폰다타라의 대장장이가 화로의 불을 끄려고 할 때 베다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자네는 또 왜 찾아왔는가?"
대장장이는 탐탁치 않은 눈으로 베다를 바라보았다.
베다. 과거 이곳에 번개수의 왕을 찾아온 이스트 앤드 최고의 마법사중 하나라 불리는 제라프의 지식을 이어받은 마법사 환영의 엘모어가 키운 유일한 제자로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현자의 등장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다는 그런 기대와는 다르게 수행은 하지 않고 놀며 지냈기 때문에 타카마가하라에서 그다지 평가가 좋지는 않았다.
"물건 좀 만들어 줬으면 해서."
베다는 콘솔을 조작해 그것을 꺼냈다.
깨끗한 상아색에 파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다. 오른손의 골격모형처럼 생긴 그것은 사람의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컸으며 손목 부분에는 낫처럼 생긴 뼈가 돋아나 있다. 타카마가하라 근처에 위치한 영소 '번개의 요람'에 살고있는 거대 영수 라이쥬(雷獸)의 오른 앞발뼈다. 타카마가하라의 대장장이라면 한 번쯤 만져보고 싶은 아이템이기도 했다.
"이걸 어떻게좀 쓸 수 있게 해줘. 참고로 이건 전기를."
"전기를 뿜어낸다고? 그건 알고 있어. 이걸 쓸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 내 기술과 잇폰다타라에 내려오는 비기를 써서 이걸 훌륭한 무기로 바꿔주지."
대장장이는 후후하고 웃었다.
", 괜찮겠지.."
베다는 대장장이를 보고 홀로 중얼거렸다.
 
"뭐하고 다녔던 거냐, ."
다음날 베다는 대장장이가 내놓은 물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마을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마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젯밤 거점에 있는 기록들을 살펴보니 스승인 엘모어가 이곳 사람들에게 현자로 칭송을 받았다고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에게는 적의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그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서도.
대장장이가 내놓은 물건은 곡도였다. 칼날과 자루가 하나로 되어 있으며 모습을 보니 그 뼈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형태는 타치에 가깝다. 거기에 푸른 빛이라고 확연히 구분이 갈 정도로 확연히 구분이 갈 정도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머리카락이 일어서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전력을 뿜어내고 있다.
뇌조골도. 일단 콘솔창에 나타난 이름이다. 그 외에도 사용 조건은 전격 저항 7위계 이상이다. 초기 어빌리티 포인트(Ability Point)를 모조리 투자한다 해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베다는 계승 캐릭터이기 때문에 아무런 어빌리티 포인트도 없는 상태였다. 차라리 라이쥬의 앞발뼈(전격 저항 5위계 이상일 시 방전으로 인한 대미지를 받지 않는다)가 더 허들이 낮았다. 대장장이에게 뭐라고 따지고 싶지만 뿌듯한 표정을 지은 것으로 봐서는 장난을 쳤다고 해도 자신은 모든 기술을 어김없이 발휘한 물건임은 틀림없었다. 베다는 이걸 따졌다가는 또 마을 평판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자 한숨이 나올 따름이었다.
베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뇌조골도를 인벤토리 깊숙한 곳에 봉인해두는 것뿐이었다.

2012년 9월 17일 월요일

월드 호라이즌 -1화 타카마가하라 - 전승아이템과 계승 거점


눈을 떠보니 나무로 만든 집 안이었다. 오른손을 올려 허공에 무언가를 두드리는 듯이 움직였다.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스테이터스 창이다. 이름과 체력, 그리고 베라카(Berachah)라는 마력수치가 표시되어 있다. 베다는 스테이터스 창 옆에 있는 인벤토리 창을 열었다. 그리고 실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월드 호라이즌>에는 전승이라는 시스템이 있다. 이것은 대격변 이전의 플레이어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의 일종이다. 대격변 이전의 어빌리티 데이터 일부를 대격변 이후에 새로 만드는 캐릭터에게 주는 것이다. 또한 이 세계에서 이전의 캐릭터와 어느 정도의 연관성을 가진 스토리도 준비되어 있으며 독자적인 전승 퀘스트를 통하여 그것을 즐길 수 있다. 물론 전승을 포기한다면 이런 특혜를 받을 수 없겠지만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전승 퀘스트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기 때문에 전승을 선택했다.
또한 계승을 선택할 경우 또 다른 특혜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아이템의 전승과 계승 거점이다.
아이템의 계승은 스토리상으로 스승이나 부모가 남긴 물건이다. 일반적으로 이전의 캐릭터가 가진 상급 아이템일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는 상당히 유용한 아이템이 나오기도 하지만 지금 상황에 전혀 쓸모가 없는, 통칭 꽝이 걸리기도 한다.
베다가 전승받은 아이템은 <라이쥬(雷獸)의 오른쪽 앞발뼈>였다. 상급 재료 아이템이자 가공을 하지 않아도 메이스나 완드처럼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거기에 물리공격에는 전격효과 추가, 마법공격의 경우 1위계 상승효과라는 훌륭한 옵션이 붙어 있다. 하지만 이 옵션이라는 것은 한 가지 함정이 있었다. 아이템의 설명에 보면 라이쥬의 팔꿈치에서 발톱까지 붙은 다리뼈이다. 번개를 뿜어내는 라이쥬의 뼈는 계속해서 전기를 뿜어낸다. 5위계 이상 전격 저항 어빌리티가 없다면 감전 될 것이다.라고 나와 있었다. 그렇다. 물리 공격에 전격 효과 추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뼈 자체가 전기를 뿜어내는 것이고 전격계열 마법의 1위계 상승효과도 방전하는 전기를 마법에 덧씌워서 내는 것이다. 거기다 막 시작한 베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사용하지 못할 물건이었다.
베다는 인벤토리 창을 닫아버렸다. 이 물건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베다는 일단 집안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계승을 선택할 경우에 얻는 두 번째 특혜는 바로 이 계승 거점이다. 일단 거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활동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지점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캐릭터가 소유한 부동산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퀘스트에 대한 보상이나 구입을 통하여 얻을 수 있지만 계승을 할 경우에는 거의 확실하게 거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경우에도 취득 조건이 있는데 기존의 케릭터가 거점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들어간 마을에 거점을 얻게 된다. 또한 마을 사람들과의 친밀도와 인지도에 따라 거점의 질이 달라진다. 즉 해당 마을과의 관계에 따라 집의 형태가 정해진다. 무난한 플레이를 했다면 평범한 집을 얻을 수 있지만 돈이 없다거나 하면 집의 질이 낮아지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면 감옥의 방 하나를 거점으로 주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베다가 있는 집도 계승 거점이다. 계승 했을 때 시작하는 장소는 무조건 계승거점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베다의 경우 부엌이 달린 거실과 방 2개가 달린 집이다. 이정도면 무난하다고 볼 수 있었다.
전승 아이템은 꽝이었지만 계승 거점은 무난하다. 거기다가 의외로 이 거점에는 소모품들이 많았다. 초반에 돈이 빠져나가는 것은 어느 정도 막은 것 샘이다.
베다는 짐을 챙겨 거리로 나가기로 했다.

월드 호라이즌-프롤로그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인다. 도로의 아스팔트에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한여름의 수영장은 사람들로 복잡했다.
더워.”
강림이는 소금을 탄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바로 옆의 실내 수영장을 바라보았다.
2수도 지정기념공원 안에 위치한 대수영장. 완공 된지 5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청소만으로도 50명 이상이 동원되는 어마어마한 넓이에 지금처럼 여름휴가철이면 200명 가량 아르바이트를 모집할 정도였다.
강림이도 휴가철의 막바지인 오늘로 아르바이트를 끝내게 되었지만 요 한 달간 실내수영장을 담당한 적은 한 번 뿐이었다. 운이 없는 탓이었다.
병에 담긴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두 시. 교대 시간이었다. 강림이는 절룩거리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누군가가 목발을 건내주었다.
고마워.”
강림이는 목발을 받아들었다. 눈앞에 건장한 체구에 갈색 피부를 한 남자가 입안 가득히 웃음을 짓고 있었다.
노달박. 나이는 강림이와 2살 많은25살이다. 노힐대학교 체육과 4학년이다. 나이를 알게되고 말을 놓으라고 말할 정도로 성격이 호쾌하다. 게다가 남을 잘 도와주는 사람이다. 강림이와는 이번 황금연휴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와서 알게 된 사이였다.
고맙긴 뭘, 들어가서 쉬어.”
달박이가 강림이의 등을 살짝 두드리고는 의자 위로 올라갔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달박이 림을 붙잡았다.
너 월드 호라이즌이라고 아냐?”
월드 호라이즌(Would Horizon). 세계 최초의 가상현실게임으로 알려져 있는 온라인 게임이다. 현실 이상의 자유도와 세계 각국의 신화를 토대로 한 방대한 설정에 그 무엇보도 세계관의 역사를 모조리 플레이어게 일임하는 대담함 때문에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가상현실에서 부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3년 전까지는 했었어.”
너 다시 할 생각은 있냐?”
글쎄. 아직 생각중이랄까. 일단 이것부터 해결 해야지.”
림이는 오른쪽 무릎을 살짝 두드렸다. 부러진 지 반년이 다되어 간다. 재활치료를 시작한지 3개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목발이 없으면 무릎이 아팠다.
그건 수영장 재개장까지 무리잖아. 그 동안이라도 하면 안 되겠니?”
못할 것도 없지만, 무슨 일인데 그래?”
그게 말이지. 어제, 정확하게는 오늘 새벽 2시에 4차 대격변이 끝났거든.”
대격변. 월드 호라이즌의 대규모 패치를 의미하는 말이다. 평소에는 손도 안 대던 개발자들도 이때에 게임에 손을 본다. 그렇다고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나 NPC가 역사적으로 커다란 사건을 일으킬 경우에 실시한다. 대격변의 기간은 대체로 1년 정도이지만 어디까지나 개발자들의 수정 능력에 달려 있다. 그동안 54의 현실과의 시차비율이 100배 가까이 증가해버린다. 이는 초창기 베타시절에 배경을 석기시대로 설정한 것에 테스터들의 항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대격변이후의 변화한 세계를 비교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되었다고 한다.
대격변은 월드 호라이즌의 거대한 이벤트이기도 하며 이는 이후 한 달 간의 체험 기간을 갖게 된다. 기존의 플레이어가 적응하도록 그리고 새로운 플레이어를 포섭하려는 목적이었다.
동생이 이번 체험 기간 동안 도전하려고 하거든. 그런데 알다시피 난 이제 졸업준비를 해야 하니까. 네가 동생을 도와달라는 거지. 물론 공짜로 해 달라는 건 아니고 아르바이트처럼 하는 거니까.”
달박이의 말에 림이는 잠시 생각했다. 일단 돈이 들어온다. 전에는 대학도 다녔지만 무릎을 다치고는 그만두었다. 게다가 재활치료를 겸한 아르바이트장은 지금 내부 수리 중에 있다. 일단 돈도 벌어야 하고, 부업 비슷하게 하면 되겠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할 수야 있지만 나도 준비를 해야 하니까 일주일 정도 시간이 걸릴걸.”
그건 걱정하지 마. 동생용 캡슐을 주문해야 하니까. 우리도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하니까. 일단 일주일 뒤에 연락할게.”
달박이는 이렇게 말하고 버스 승강장으로 뛰어갔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 다시 게임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재활훈련에도 도움을 준다는 연구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재활치료를 한다는 병원도 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림이는 절뚝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2012년 9월 6일 목요일

기둥이 없는 집은 편치 않다.


기둥이 없는 집은 편치 않다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은 이 나라 최대의 종이다. 그 음색은 죽은 자는 성불하고 병자는 병이 낫게 된다고 하는 신령한 종이다.
날 이곳에 불러낸 이유라도 있는가. 신지?”
눈을 감은 남자가 묻는다.
그냥, 뭐 공양이라도 해 달라고나 할까.”
공양이라…….”
그래. 운명에 짓눌린 불쌍한 자들의 공양.”
신지는 종을 조용히 바라본다.
운명에 짓눌린 자들의 공양이라.”
이 세상에는 미담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니 말이야.”
신지는 종에 가까이 다가간다.
밝을수록 그림자는 짖어진다. 아름다울수록 어두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이 세상의 균형이라는 말이로군.”
뭐 그 또한 운명인거지…….”
 
1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주변에서 쇳물이 끓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고당목(鼓撞木) 이번엔 어떨 것 같은가?”
몸이 건장한 사내가 땀에 절어 있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묻는다.
글쎄요. 일단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제 실력의 문제이겠죠.”
고당목이 웃는 얼굴로 말한다.
그렇다면 실패할 리가 없을 것일세. 이 나라에서 자네만큼 실력 있는 사람도 드문 일이니까.”
사내가 웃으며 나간다.
하지만 고당목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다.
그가 이 일을 의뢰받았을 때 그는 기쁨보다 두려움이 컸다. 바로 그의 스승이자 장인이 한 예언 때문이다. 신의 종을 만들 업을 지닌 자. 스승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는 또 한 가지를 예언했다.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처음에 그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이 의뢰가 들어왔을 때 그는 스승의 예언을 떠올렸다.
이 일을 의뢰한 사람은 이 나라다. 국사(國社)에 안치할 종을 만들 것. 그가 받은 의뢰. 그도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다. 몇 년이나 사람들이 매달렸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미 몇 명의 종장인들이 이 일로 목숨을 잃었다. 대가 바뀔 정도의 시간이 들었지만 성공하지 못한 일. 그럼에도 나라에서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장님. 주조가 다 되었습니다.”
부하의 목소리에 상념이 끊긴다.
그래. 이번에는 성공하길 바라야지.”
틀에 부은 쇳물이 다 식기를 기다린다. 쇳물이 다 식으면 들로 사용되는 흙을 걷어낸다. 이것으로 일차적인 완성이다.
흙을 걷어내는 작업이 끝나갈 즈음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종이 완성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국사를 주도한 만월부인이다. 그녀는 이렇게 종의 주조가 끝이 날 때마다 찾아온다.
일차적인 작업은 끝났습니다. 소리가 잘 나는지 실험을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세공을 할 수 있습니다.”
고당목은 벌써 몇 번이나 해온 설명을 한다.
고당목 잘 들으세요. 나라에서 준비한 동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번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흙을 전부 걷어냈다. 인부들이 종을 임시 걸이에 건다. 그리고 종을 친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이다. 제발 성공하기를.
종에서 맑고 은은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인부들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은 성공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나자 사람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종을 바라보았다. 그때 종이 걸이에서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종은 그 자리에서 깨져버렸다. 종고리가 종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탓이다.
이번에도 실패로군요.”
만월부인의 목소리가 냉정하게 들린다.
…….”
죽음은 이미 각오한 바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실패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압박은 전부터 받아 온 것이었다.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전하.”
목에 땀에 전 수건을 두른 사내가 만월부인에게 아뢴다.
무슨 말이지?”
종은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종고리가 종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어야만 합니다.”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리고 이 나라에는 그를 능가하는 종장인은 없습니다. 그에게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않으신다면 신종을 만들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좋다. 자내의 간곡한 간청으로 고당목 너에게 앞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다음은 없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너 뿐만 아니라 네 가족들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라.”
만월부인은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공방을 나갔다.
 
2
 
가루라(歌淚囉)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녀의 바람은 종의 완성. 그녀의 남편인 고당목이 평생의 숙원이자 생명을 담보로 한 종 주조 작업을 끝내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온 것은 고당목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분명 그는 남편의 밑에서 일하고 있던 장인이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루라가 묻자 장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 모습에 가루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되묻는다.
주조가 실패했습니다.”
장인의 말에 가루라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 군제시여…….”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월부인께서 기회를 한 번 더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실패한다면 대장뿐만 아니라 당신까지 위험해 집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르신의 간청으로 만월부인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지만 이번에 실패한다면 가족까지 극형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가루라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 어떻게 해아 합니까.”
가루라의 말에 장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루라는 오열했고 장인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글쎄요. 저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말이죠. 지금은 그저 대장이 주조에 집중하도록 기도 하는 것이 전부 인 것으로 보이는 군요.”
장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3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은 지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번의 해가 졌고 달의 모습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녀가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장인이 떠나기 전에 한 말처럼 그저 남편의 주조가 훌륭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아우.”
옹알이 소리가 들린다. 시선을 돌린 가루라의 눈에 아직 어린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고금동(鼓金童).”
가루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아이를 부른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옹알이를 한다.
너는 절대로 신종을 보지 못할 거다.’
갑자기 떠오른 아버지의 예언에 가루라의 머리에 경종을 울린다.
저 녀석은 도망치려는 버릇이 있어. 그것만 해결하면 신종을 만드는 것쯤은 간단할 텐데 말이다.’
공방의 어르신이 한 말이 떠오른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더군요. 더 이상 실패를 용납할 수 없다는 거죠.’
종의 주조는 보름달이 뜬 다음날이라고 합니다.’
가루라가 밤하늘을 바라본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밝게 비추고 있다.
그게 네 운명이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떠오른다.
도망갈 길이 없다면 녀석은 제대로 할 거다.’
가루라는 고금동을 안아든다.
외출복을 찾아 입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가루라는 고금동을 들고 밤거리를 달린다.
가루라가 도착한 곳은 바로 종을 만드는 공방이다.
여보. 여긴 어떻게?”
공방 안에는 고당목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나요?”
모두들 잠을 자로 갔어요. 그런데 당신은 여기에 무슨 일이오?”
다행이네요.”
가루라는 살포시 미소 짖는다.
다행이라니. 당신 이곳은 여자가 출입해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요?”
고당목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가루라는 천천히 쇠를 끓이고 있는 도가니로 다가간다.
알고 있어요. 벌써 쇠를 끓이고 있군요.”
가루라는 도가니를 끓이는 불을 바라본다. 이글거리고 타오르는 잉걸불에 매료된 눈빛에 고당목은 불길함을 느꼈다.
여보. 이건 운명이에요.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제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요?”
고당목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가 느낀 불길함이 확신이 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부정한다고 해도 움직이기 시작한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는다.
그만…….”
고당목은 절규한다.
가루라. 눈물과 함께 하는 노래. 그게 제 이름이에요.”
…….”
그리고 이 아이. 우리 아이. 종의 아이라는 이름을 가진 불쌍한 아이.”
그제야 고당목은 가루라의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의 아이를 바라본다.
알고 계셨던 겁니까…….”
절규 속에서 중얼거린다. 그 이름을 지은 자신의 스승을 향해 묻는다. 하지만 이곳에 없는 그의 스승은 대답하지 않는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이 모든 것은 운명이니까.”
가루라는 미소를 지으며 용광로로 걸어간다.
막고 싶다. 막고 싶다. 반드시 막고 싶다. 저건 막아야만 한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어째서…….”
고당목은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몸에 의문을 가진다.
이것이 운명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인가?’
그럼 안녕히.”
용광로의 불길 속에서 가루라는 웃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
고당목은 절규한다.
 
어째서냐. 어째서 막지 않은 것이냐.
원망한다. 이곳에서 가만히 있는 자신을. 국사를 일으킨 만월부인을. 그리고 자신에게 이런 운명을 지우게 한 이 세상을.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아니 깨닫고 있었다.
이것을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이유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몸속은 광기로 가득 찼다.
가족을 잃은 자의 분노. 그러나 최상의 물건을 만들어 낸다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그는 미칠 것 같은 기쁨이 있다. 이런 모순 속에서 그는 쇠를 두드렸다.
 
4
 
종이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인부들이 공방에 왔을 때는 이미 모든 과정이 끝난 종이 놓여 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쇠를 녹였던 용광로 옆에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 종을 종루에 걸고 쳤다.
그러자 괴의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종소리를 들은 자는 미쳐 버렸다.
밤에는 짐승들이 나타나 울부짖어 사람들이 불안에 떨게 했다.
도깨비들이 궁성 안을 들락거리고 괴질이 돌았다.
만월부인이 그 종을 부수려고 한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종을 칠 때마다 들리는 아이와 여인의 비명소리. 고통에 찬 저주의 비명소리에 만월부인은 매일같이 잠을 설쳤다.
 
그래서 저 종을 부수려는 것입니까?”
팔부관이 물었다.
그래요. 저 종소리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아요. 도성 사람들은 모두 미쳐버려 온전한 사람이 아무도 없을 지경이라구요.”
원래 기둥이 업는 집은 편치 않은 법이지.”
팔부관이 중얼거린다.
하지만 저 종은 이 나라의 보배요. 함부로 부수어서는 안 될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이에요?”
내가 듣기로 저 종이 만들어졌을 때 옆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고 들었소. 그 나무로 당목을 만들어 종을 치면 다신 변고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팔부관은 말을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가 좋아.”
그렇지. 이 소리를 들으면 온갖 요사스러운 것들은 물러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영혼은 성불한다고 하니까.”
그게 사실인가?”
글세? 일단 그때 일어난 변고는 모두 해결 되었다고 하니까. , 아이와 부인은 종이 되고 자신은 당목이 되었으니 이 또한 운명인 게지.”